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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인가 '남대문'인가

바다 언덕 2015. 10. 24. 23:13

 

국보 1호는 <숭례문>이다.

전에는 그냥 '남대문, 남대문'하였는데 이제는 대부분 숭례문이라고 한다.

혹여 남대문이라고 했다가는 무식한 사람이 되기 쉽다.

어떤 노인의 잘못으로 불탔지만, 여전히 국보 1호이다.

이후 신응수 대목장을 중심으로 다시 복원 공사를 하였지만 부실 공사로 문제가 많다.

 

그런데 국보 1숭례문남대문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고은 시인이 '남대문 폐허를 곡함'이라는 시를 조선일보에 발표했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남대문'이라는 단어가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다.

 

이 '남대문'이라는 단어는 과연 일제의 잔재일까.

 

우리가 어렸을 때 불렀던 '동대문, 남대문'은 과연 일본제국주의의 음모일까.

신응수 대목장의 홈페이지에서 숭례문남대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제가

우리 문화재에 대한 비하의 의미를 가졌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인터뷰를 보고, 

이 인터뷰의 영향이 크구나 생각되어,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신응수 대목장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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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하시고 거의 끝마무리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신응수 대목장은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말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를 격하시키고자 단순히 방향만을

지칭하는 뜻의 남대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라며 정식 명칭인 숭례문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숭례문''남대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시면 아실 텐데요. '남대문'이라고 검색을 하면 무려 516건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보여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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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이성계)5-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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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5-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려고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부)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모관(毛冠갑옷·궁시(弓矢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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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시듯이 그냥 방위를 나타내는 말에 '대문'을 붙여서 호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동대문','남대문','서대문' 그랬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남대문'이라는 단어와 '숭례문'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오히려 '남대문'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옵니다. 실록 해석이 아니라 원문 자체가 말이죠.

 

이 사실은 오히려 남대문이라는 명칭이 더 대중적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자를 모르는 서민들이 '崇禮門'이라는 단어를 읽을 줄 알았겠습니까?

그저 양반 사대부들이나 현판을 바라보고 읽었겠지요.

 

선생님께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이시기 때문에 한 마디 한 마디가 힘을 갖고,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일제가 남대문을 대중화시키고, 실제 이름은 '숭례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추측은 그저 추측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 고은 선생님이 방화로 인해 불타자 '남대문 폐허를 곡함'이라는 시를 신문에 발표를 하셨는데

인터넷에서 많은 비판을 받으시더군요. 일제가 심어놓은 '남대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고요...

 

그건...아닌데요...

 

이렇게 억울하게 비판을 받으시니, 잘못된 정보가 주는 피해가 사이버 상에서는 너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내용이 신응수 선생님께 전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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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덧붙이면 이렇다.

 

- 한양 도성을 쌓고 각 방위에 출입문을 만든 것이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북대문이고 ,

  다시 4방위 사이에 문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사방팔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숭례문이라는 단어보다 남대문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남대문: 252회 사용, 숭례문: 203회 사용(원문기준)]

 

남대문’, ‘동대문이라는 단어는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오히려 대중적이며 일반적인 단어이다.

 

-  ‘동대문흥인지문이라고 하는데, ‘흥인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흥인문이 원문 기준으로 196회나 사용된 반면에,

  ‘흥인지문은 단 5건에 불과하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 (), (), ()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이라고 하였다. 현판에 지()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 앞의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라고 한다(인용)]

  그러므로 지(之)는 대문 이름과는 상관 없는 어조사에 불과하므로 흥인문이 옳다.

 

- 동대문, 남대문 등등이 일제의 잔재라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각종 교통 안내 라디오 방송 리포터들이 이전에는 동대문, 남대문이라고 하다가

  대부분 숭례문’, '흥인지문'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다.

 

-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방위의 개념이 들어있는 동대문, 남대문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쉽게 느껴진다.

  동대문 쪽이 차가 많이 밀린다는 방송이 나오면 아하~ 서울 동쪽이 지금 차가 많이 밀린다는 것을 금방 이해한다.

 

- 확인되지 않은 정보나 오류라도 권위 있는 사람이 말하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각계의 일정 수준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